18세기에는 지구 기후가 일관되게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다는 지구 냉각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자연학자 뷔퐁은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 북부 지방에서 발견된 ‘코끼리’ 화석을 근거로 지구 냉각설을 주장했다. 그는 열대 동물인 코끼리가 한때 이러한 고위도 지방에 살았으니 지구 전체 기후는 현재보다 현저하게 따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퀴비에는 뷔퐁이 언급한 화석이 코끼리와는 상이한 화석 동물인 매머드와 마스토돈의 것으로, 이 동물들은 추운 기후에 살았음을 밝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지질 시대에 열대성 기후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는 증거가, 석탄 광상에서 발견되는 열대성 화석 식물에서 나왔다. 고식물학의 연구를 통해 현재 냉대 기후를 보이는 북유럽이 고생대 석탄기에는 열대 기후였음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지구가 용융(鎔融) 상태에서 식으면서 지구 기후도 서서히 일관되게 서늘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지구 냉각설에 따라 밖으로 유출되는 지구 내부의 열이 지구 기후를 결정하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지구 기후 변화에 대한 관념은 대립하는 지질학 이론인 격변설과 점진설의 논쟁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널리 수용되고 있었던 격변설에서는 과거에 지속되던 대부분의 지질학적 안정기를 간헐적이고 급격한 지각 변동이 중단시킨다고 주장했으므로 완만한 지구 냉각은 안정기의 특성으로 여겨져 지구의 냉각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 반면에 점진설은 안정기 사이사이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부정하고 지질 변화는 늘 조금씩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지각 융기와 침강의 무한히 반복되는 사이클을 설정하는 것이 점진설의 핵심이었다. 점진설을 주장한 영국의 지질학자인 라이엘은 석탄기에 열대 식생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과거에 지금보다 높은 기온이 전반적으로 더 오래 지속된 것은 지구의 냉각과는 무관한 다른 요인들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육지가 바다보다 태양의 복사열을 더 많이 흡수하므로, 대륙의 분포가 적도 지역에 많아지면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극지방에 많아지면 지구의 평균 기온이 내려가는데, 이러한 사이클이 지속되면서 지구의 평균 기온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점진설의 기후 변동 가능성에 대한 주장의 영향을 받아 오래되지 않은 지질학적 과거에 극심하게 추운 기후가 존재했다는 주장인 빙하기설이 등장하여 점진적 냉각이 지구 기후의 일관된 경향이라는 생각은 본격적으로 도전받게 된다. 지질학자들은 북유럽과 북아메리카가 오래되지 않은 과거 지질 시대에 광범위하게 빙하에 덮여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기반암이 심하게 긁힌 흔적과 주변의 암석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 바윗돌인 표석이 널리 분포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격변론적인 지구 냉각설에 따라 대홍수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였다. 오랫동안 녹지 않고 쌓인 눈이 얼음으로 굳어지고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서서히 비탈을 따라 이동하며 바닥을 긁으면서 긁힌 자국과 표석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었다. 현재의 빙하의 이동으로부터도 이러한 빙식 지형들이 발생하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현재 빙하에 덮여 있지 않은 지역도 한때 빙하로 덮여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빙하기설이 학계에서 순조롭게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1830년대에 미국의 자연학자 아가시는 오래되지 않은 지질학적 과거에 빙하기 동안 유럽을 덮고 있었던 광범위한 얼음층에 의해 홍적층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아가시는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진 것을 가정했고 그로 인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이 두꺼운 얼음으로 덮이면서 지구상의 생명을 모두 앗아 갔다고 했다. 아가시는 지구가 서서히 냉각되는 것은 맞지만 그 과정이 연속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오랜 안정기 사이사이에 급격한 기온의 하강과 상승이 때때로 일어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격변론자였다. 하지만 지구 평균 기온의 급격한 하강과 상승으로 인하여 지구 전역이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추운 때가 있었다는 생각은 지구 냉각설의 기본 전제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아가시는 1840년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홍적층에서 긁힌 자국과 많은 표석을 발견하고 그것을 빙하기의 증거로 해석했다. 이에 대하여 라이엘은 자신의 기후 변동 사이클과 합치된다는 이유에서 비격변적 빙하기의 존재는 받아들였지만 홍적층의 표석들에 대해서는 유럽이 한때 얕은 바다로 덮여 있었을 때 녹는 빙산에서 떨어진 잔해로 설명된다는 이유로 빙하기의 증거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 외에 많은 지질학자들도 아가시의 견해를 경험적 근거를 들어 배격했다.
1850년대에 이르자 대다수의 지질학자들이 진지하게 빙하기설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틴들을 포함한 지질학자들의 연구는 빙하가 지질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냈다. 이 시기에 지질학자들은 격변설에서 벗어나 지구 시스템의 지속적인 변화 양상의 하나로 기후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지질학자들은 빙하기설을 지지하는 지질학적 증거 들을 더 많이 발견하였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산들이 보이는 특징에서 계곡이 흐르는 물에 의해 침식되지 않고 빙하에 의해 침식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들은 흐르는 물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V 자형 계곡과, 빙하에 의해 침식된 후 얼음이 녹아 노출된 U 자형 계곡을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지각 위에 빙하나 암석이 쌓이면 지각이 침강하고, 빙하기 이후에 빙하나 암석이 사라지면 지각이 융기한다는 지각 평형설의 주장은 관찰된 증거들을 통해 지지되었다. 이렇게 빙하기는 새로운 지질학적 증거들의 누적으로 점차 과거의 사실로 자리를 잡아 갔다.
18세기에는 지구가 용융 상태에서 냉각되면서 지구 기후가 일관되게 서늘해지고 있다는 지구 냉각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19세기에 지질의 안정기 속에서 간헐적으로 큰 변동이 일어난다는 격변설과 지속적이고 주기적인 지질 변화를 상정하는 점진설이 대립하였는데, 격변설은 지구 냉각설에서 기후의 일관된 변화 과정을 받아들이기 쉬웠던 반면에 점진설은 주기적인 변동 속에서 기후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다가 지질학적 증거로부터 과거에 지금보다 더 추운 기후가 전 지구를 지배한 적이 있다는 빙하기설이 나오면서 일관된 냉각이라는 지구 냉각설의 핵심 주장은 도전을 받았다. 여러 논쟁 후에 관찰된 증거들이 쌓이게 되자 1850년대에 지질학자들은 빙하기의 존재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